베를린 숙소에서 내가 라이프치히에 가려고 한다니까 "라이프치히 볼 거 하나도 없어요." 라고 했던 21살 동글동글한 여학생 생각이 나네. 뭐 어때. 나는 라이프치히에 가서 바흐 박물관과 바흐 무덤, 카페 바움만 다녀오면 되는데 뭘.
버스 안은 적막하다.
이따금 적막을 깨고 내가 DSLR 셔터를 찰칵 누르는 소리만 순간을 날카롭게 찌르고 금세 사라진다.
처음에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내 익숙해진 듯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다.
앙상한 겨울 숲과 농경지가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오스트리아 항공 기내에서도 이 아이들이 멀리 보였었는데
풍력 발전소인가 보다.
독일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런 풍차를 흔히 볼 수 있다.
아, 예전에 한 라디오 팟캐스트에서 유시민 씨가 독일의 전력 시스템에 대해 말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은 핵발전소가 없고 풍력 발전소를 이용하는 등 해서 전력 생산량이 풍부하고
이를 이웃 나라에 팔기도 한다고.
바람이 그만큼 세게 부는 지역인가?
어느 정도의 풍량이 확보되어야 가능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창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윽고 라이프치히에 도착.
오후 4시 정도 되었다.
이제 내려야 한다.
그런데 아뿔싸.
버스에서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떽떼구르르르르르르 소리가 나며
시그마 10-20렌즈의 렌즈캡이 떨어졌다.
나는 하얗게 질려 버스 밑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다.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나 혼자만 남았다.
버스 기사가 화를 낸다.
출발해야 하니 빨리 내리라고.
1분만 봐 달라며 애원을 하고 주변을 뒤졌다.
이 버스 안에 있는게 분명한데 못 찾다니.
온 좌석 밑을 뒤졌는데 보이지 않는다.
버스 기사의 내리라는 독촉은 더 심해졌고
나는 끝내 단념하고 미안하다고 하고
그냥 버스를 내렸다.
아 우울해진다.
기가 막힌다.
여행 5일 전에 구입한 새 렌즈인데
렌즈캡을 잃어버리다니.
분하다.
어디에 잃어버렸는지 확실치 않은 상황도 아니고
버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알면서 포기해야 한다니.
렌즈를 잃어버린 건 아니잖아.
렌즈캡은 또 사면 되는 거니까,
라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 보지만
속이 상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라이프치히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상하다니.
라이프치히의 고속 버스는
베를린처럼 큰 ZOB 시설이 있는 게
아니고 한국 소도시에서 가끔 그러하듯
그냥 일반 시내버스처럼 길가에 내려준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도 모르는데.
당황스럽지만 사람들이 많이 이동하는 쪽을 쫓아가니
중앙역이 멀지 않았다.
여튼 중앙역 쪽으로 향한다.
중앙역의 투어리스트 인포에서 지도를 받아야 되니까.
(는 개뿔. 여기에도 중앙역에 투어리스트 인포가 없었다)
캐리어를 끌고 등짐, 삼각대, 카메라 가방을 어깨와 등에 매고
카메라는 목에 걸고 돌길을 걸어가면서
옆에 소매치기가 도사리고 있진 않겠지 하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재빨리 찍은
라이프치히 중앙역의 사진.
역사에 들어왔다.
15kg의 캐리어를 끌고
카메라 장비들을 몸에 지고 5분 가량 걸었더니 지친다.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은 어디에?
안내판이 있다. 여기서 저기까지 가랜다.
이 짐들을 지고? 으악!!
(드레스덴에서도 그러더니 여기서도 이러네ㅜㅜ)
왜 이런 불편한 시스템으로 운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중간에 트램 정류소와 공원, 횡단보도 몇 개를 건너면서
헥헥거리며 인포에 도착.
아 진짜 힘들다
하는 와중에서도 의무감으로 억지로 찍은 사진.
가로등 저 앞에 자세히 보면 i표시가 보인다.
이 곳에서 지도와 라이프치히 관광지/숙소를 안내한
무료 책자를 받아 들었다.
해가 꼴까닥 졌다.
밤인데 아직 숙소도 못 잡았다.
목록 중에서 글로베트로터 하우스라는 게스트하우스가 하나 있다.
여행 가이드북에도 언급되어 있던 숙소이다.
이 곳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그곳은 중앙역 부근에 있으므로 아까 거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15kg 캐리어를 끌고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
등에 배낭을 매고
목에는 DSLR을 걸고
걷는다.
기진맥진하기 일보직전이고
겨울인데도 몸에서 땀이 난다.
역사 정문이 아니라 서쪽에 난 문 옆의 길을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가야 한다.
이쪽 길은 우범지대같이 뭔가 분위기가 안 좋고 무서웠다.
역 앞에 술병을 들고 있는 불량 청소년 두세 무리가 있다.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캐리어에 힘주어 경보로 헥헥대며 아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올라가다 보니 양 갈래 길이 있다.
인적이 드문 길이고
어느 쪽일까?
지도엔 표시가 애매하게 되어 있다.
갈래 지점엔 이정표같은 건물이 확실히 표시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뭐람.
주차장 P표시가 멀리 있길래 저건가 싶어 이정표 삼아 왼쪽 길로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도 나타나지 않는다 싶어 불안할 때 쯤에
나타난
호스텔 간판.
오예.
건물 외관이 허름해서 좀 불안하다.
초인종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니 낡은 소파가 하나 있었다.
리셉션은 의외로 최신 시설로 깔끔했다.
키가 크고 쾌활해 보이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금발의 남자가 맞아 주었다.
16유로짜리 6인실이 있고 19유로짜리 4인실이 있는데 어느 방을 쓸 건가 묻는다.
나는 19유로짜리 방을 택했다.
여권을 맡기고, 숙박 명부에 이름과 사인을 하려는데
바로 윗칸에 한국인 남성 이름이 있다.
어제 묵고 오늘 아침에 체크아웃한 것이다.
오, 이런 동독의 외진 도시까지 한국인이 왔다니, 반가웠다.
무료 와이파이 이용이 가능한 쿠폰과 방 열쇠,
새 시트를 받고 이제 배정된 방으로 올라간다.
글로베트로터 호스텔의 단점 하나.
엘리베이터가 없다.
오래된 아파트 나무 계단의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서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느라 고생했다.ㅜㅜ
내가 배정받은 15호실.
이곳엔 어떤 숙박객들이 있을까.
두근두근하면서 문을 열었더니
아무도 없다.
4인실을 나 혼자 쓰게 된 것이다.
좋기도 하면서 섭섭하기도 하네.
한인 민박이 아닌 곳이라서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뭐 편하게 혼자 4인실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건 아까 베를린에서 라이프치히로 출발하면서 받은 버스표.
독일 버스들은 기사가 QR 코드를 스캔하며 검표를 한다.
내 침대와 이불에 시트를 씌우는 작업을 완료하고,
혹시 모르니 자전거 체인으로 캐리어를 침대에 고정해 놓는다.
시트를 씌우는 일을 마치니 기진맥진 쓰러질 것만 같다.
도착하자마자 새 렌즈캡을 잃어버려서
기분이 상해 있었는데
생각보다 깨끗, 쾌적하고
친절한 직원이 있는 밝은 분위기의 숙소에 묵게 되어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피곤하다고 이곳에서 바로 잠들 내가 아니지!
라이프치히의 밤거리를 조금만 구경하고
돌아오기로 마음먹고
숙소를 나선다.
숙소의 공용 화장실과
깔끔하고 청결했던 샤워 시설.
다시 중앙역으로.
라이프치히의 중앙역은 규모가 크다.
지금의 라이프치는 독일 북동부의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옛날에는 유럽 각지로 가는 철도가 모두 여기서 출발하는
교통/문화/상업의 중심지여서 일찌감치 이렇게 큰 역이 지어졌다고 한다.
여기에도 스타벅스가 있다.
라떼와 카스테라를 사 들고 중앙역에서 시가지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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