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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

여자가 운동을 한다는 것과 여성주의에 대해 주절주절

 

 

 

요즘 열혈 운동러가 되어 주변에 운동의 이로움을 전파하고 다니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운동 전후로 비교해서 서술해 보겠다.

 

Before : 운동과는 담 쌓고 지내고, 초콜릿, 쿠키 류의 탄수화물 간식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라면을 좋아했고, 조금만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 통증이 심해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으며, 육교 계단 올라가는 것도 힘들어하던 저질 체력이었던 나다. 

 

After :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지저분한 인스턴트나 과자류에 대해 입맛이 뚝 떨어졌고, 지하철에서 긴 환승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도 가뿐하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갈 수 있는 체력이 되고,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되니 더 활동적이 되어 귀차니즘도 없어지고 이것저것 새로운 일에 대해 시도도 하는 에너제틱한 일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 신나는 변화가 내 몸을 더 사랑하게 만들고, 활기가 넘치니 모든 것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분까지 되는 이 기적과 같은 체험에 행복해서 사람들에게 운동을 강추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내가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을 아는 주변인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가 내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 여자들은 내가 운동을 추천하면 "그거 하면 살 많이 빠져?"라고 물어본다. 내가 운동하고 있는 요가 및 서킷 센터 강사 선생님들도 회원님은 살을 더 빼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 

 

"왜요? 전 이대로도 좋아요…"라는 말은 입 안에만 살짝 넣어둔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는 살 빼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체중을 감소시키는 행위에 일체 관심이 없다. 현재의 나는 살짝 과체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살을 빼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 건강미 넘치는 몸이 되고 싶고, 내 몸의 활력을 썩혀두고 싶지 않아서 운동하는 거야"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아무도 납득을 못하기 때문에 굳이 가치관의 차이를 강요하고 싶지도 않고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응~"그러고 넘어가는데, 요즘 이 주제에 대한 단상이 나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주 테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글을 간만에 끄적여보고자 한다.

 

 

 

#1. 다이어트에 대하여

 

 

물론 나도 이전에는 살 빼야 된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고, 항상 내 몸에 불만이 많았던 평범한 대한민국의 2030 여성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앉아서 공부만 하다 보니 살이 엄청나게 쪘었고, 10대 후반에 불어난 살을 빼지 못한 채로 20대를 맞이하여 우울해하다가 23살 때 연애에 실패하고 나서 독을 품고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한 악착같은 다이어트로 15kg을 감량하였다. 그리고 그 몸무게에서 ±3kg 범주를 벗어나지 않은 채로 20대를 보내다가, 30대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급격히 살이 쪄서, 두 달 만에 10kg이나 쪄 버렸다. 7-8년 만에 요요현상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됐고, 결혼식을 앞두고서 거의 기아 수준의 최소한의 열량만 섭취하면서 다시 7kg가까이 감량하긴 했으나 요요로 인해 체중은 두어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

 

현재의 나는 공부를 하는 게 주된 일이다 보니(학생인지라) 몇 년 째 오래 앉아있으면서 쉽게 피로해지고, BMI는 정상 범주에 들지만 언뜻 눈으로 봤을 때 <이상적>인 <여성의 체형>으로 <날씬하다>는 느낌을 주는 체형은 아니고, 살짝 통통해 보인다는 느낌의 몸집이다.

 

어떻게 해도 20대에 날씬했던 몸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나이가 먹으니 기초대사량도 점차 줄어들고, 먹는 양은 같으니 더욱 힘든 탓도 있겠고, 하루종일 공부해야 했던 수험생 시절과 본과 1,2학년을 거치며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로 먹는 게 땡기니 음식을 줄여서 살을 조금 빼는 것도 그때뿐이지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군것질과 폭식을 거듭하곤 했다.

 

 

요즘 2030여성들은 거의가 날씬하다. 특히 내가 일상에서 매일 함께하는 집단의 여성들은 통통해 보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모두가 날씬하고, 나만 살짝 육중한 느낌을 주는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늘씬한 여성들 속에서 나는 내 몸을 얼마나 미워했고, <다이어트>로 <교정>을 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쓰레기같은> 몸으로 여겼던가.

 

 

 

 

#2. 여성주의를 만나다

 

학부 때 내가 몸담았던 한 동아리에서는 여성주의, 인권, 환경보호에 관심을 지녔거나, 이를 중요한 가치로 삼고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동아리 특성상 이런 친구들이 많았던 것이지 당시 20대 전체를 모집단으로 놓고 보면 당시 대중적이지 못한 관심사에 매진했던, 어딘가 남다른(좋게 말하면 남다르고 소위 시쳇말로 나쁘게 말하면 유별난) 그룹이었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주의를 기치로 활동하는 동아리원들의 생각과 글과 활동은 내게 큰 감명을 주었었다. 원래 내겐 어려서부터 페미니스트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건 엄마 때문이었다. 8남매 중에서 여섯 째였던 나의 엄마는 페미니즘에 대해 배운 바도 없고,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로 가득한 한국의 문화에서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당췌 무엇이 엄마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아직도 미스테리이긴 한데 항상 페미니스트적인 신념을 어릴 때부터 내게 불어넣었기 때문에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엄마는 여자는 외모에 관심을 치중할 필요가 없다, 너무 예쁘기만 해도 여자는 별로다, 여자도 남자와 같은 사람이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자도 대통령, 장관, 장군, 운동선수, 박사 다 될 수 있다고 항상 내게 가르쳤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에 동아리에서 만난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들과 그녀들의 활동에 감명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을 지지했고 그들의 모든 언어들에 녹아들어 치유받았고 공감했지만,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주저했다. 왜냐하면 8-9년 전만 해도 당시 여성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 정도로 곡해된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람들은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듣고는 전투적이고 딴지나 걸고 유별나고 피곤하고 뭔가 결핍이 있어  여자들을 떠올렸다. 요즘은 젊은 여성들도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달아오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학교의 울타리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착각했던 것과 달리, 직장에서, 사회에서, 수많은 차별적 언사와 성적 대상화에 노출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부당한 권력에 의한 성희롱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들에 접어들었다. 원만한 사회 구성원이 되려면 거기에 대해 성내는 것이 아니라 유도리있게 웃어 넘겨야 되는 법이라고, 이 비틀린 사회의 룰을 하나씩 체득해 나갔다. 연애를 할 때도 남자에게 져 주고 기를 세워주고, 더 사근사근해지고 자기 주장을 웬만하면 강하게 하지 않고 웃으며 상냥한 여자가 사랑받는다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떽떽거리는 여자는 남자가 싫어해서 언젠가 버림받고 만다고, 사회적 압력으로 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점차 질식하고 있었다. 하나의 절망 때문이었다.

 

 

'나는 왜 <사람>이 아닌가. 나라는 존재는 왜 <사람>의 <변형>이자 <부록>인 존재로만 인식되는가.'

 

 

 

여기에 페미니즘은 인식론적 혁명을 가져다 주었다.

페미니즘이 내게 가르치는 바는 명확했다.

 

 

'괜찮아. 너는 <사람>이야.'

 

 

 

 

 

 

 

 

 

#3. 여성주의와 여성의 몸에 대하여 - 영화를 통해 바라보다

 

 

간단히 쓰려고 했는데 왜 이리 길어졌는지 모르겠네. 이 인식론적은 혁명은 내가 내 몸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만들어줬다. 길게 쓰지 않고 영화 스틸을 몇 컷 가져와서 설명하겠다. 미디어와 문화에 노출된 이미지는 나도 모르게 내 인식을 지배한다. 미디어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젊고, 모델과 같은 늘씬한 몸을 지녔고,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출처미상

 

 

 

위의 《미녀삼총사(원제:Charlie's Angels)》에 등장한 세 주인공이야말로 미디어가 이상으로 여기고 제시하는 <여성>에 딱 부합하는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Tube Entertainment

 

 

 

남자 주인공 옆에서 민폐를 끼치거나, 남자 히어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주적인 전사로 등장하는 여성이어도, <여전사>는 섹시해야 한다.

 

 

 

ⓒ2014 20th Century Fox

 

이런 이미지의 여성상들 말이다.

 

 

 

 

영화에 남성은 흑인, 백인, 키큰 남자, 키 작은 남자, 못 생긴 남자, 잘 생긴 남자, 몸집이 큰 남자, 마른 남자, 뚱뚱한 남자, 소년, 청년, 7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역할이 주요 배역을 맡고, 어떤 남성상이 이상으로 여기고 제시하는 <남성>으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 또는 <인간 군상>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여성은 어떤 이미지로만 대상화가 된다. 이게 흔히 말하는 <성적 대상화>이다.

 

 

 

위의 이미지에서 제시했던, <이상적>인 <여성>이라고 <성적 대상화>가 되지 못하는, 실패한 이미지의 여성도 우리가 <여성>이라고 여기는가?

흔히 제3의 성 운운하는 <아줌마>를 보면 우리는 <여성>으로서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평가 절하한다.

 

 

ⓒ오형근

 

 

위의 사진에서 보여주는 이미지의 여성들은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나, 성적 대상화를 시키기에는 동떨어진 이미지의 여성들이다.

우리는 이 여성들은 <여성>, <여자>가 아니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아줌마는 제3의 성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성적 대상화로만 그 가치를 인정/폄훼당하는 존재자로서 여성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단순한 이 인식론적인 폭력이, 수많은 여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나이를 먹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완벽한 여성의 몸에서 멀어져갈수록 실패했다고 여기고, 자신의 몸을 미워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여성주의는 이런 불평등한 인식의 지평에서 내게 큰 선물을 안겨 주었다.

 

괜찮아, 너는 여자이기 앞서 사람이야, 라고 말이다.

 

 

이런 미디어의 불평등한 인식론적 폭력에 사이다를 던져 준 영화사적으로 업적에 남을 몇 가지의 작품이 최근 몇 년 간 소개되었다.

 

 

 

ⓒColombia Pictures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 2016》에 등장하는 네 여성은 그동안 미디어에서 숱하게 다뤘던 방식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젊고 아름답고 S자형 몸매를 지닌 늘씬한 몸을 그대로 보여주도록 딱 달라붙은 옷을 입은 여성들만이 등장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가 스토리고 뭐고 다 떠나서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 뚱뚱해도, 덩치가 커도, 완벽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 그냥 그녀들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만으로도 영화의 주연을 맡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Warner Brothers Pictures Inc.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또한 마찬가지이다. 늙건 젊건 어떤 Morphology를 하고 있건간에, <여성>도 꿈을 꾸고 현실과 투쟁하며 격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을 느끼게끔 한 영화였다.

 

 

 

 

 

 

 

#4. 모든 여성의 몸을 사랑하게 되다

 

 

영화를 예를 들어 여성주의가 내게 인식론적인 지평을 넓혀주고 뒤집어 준 것을 설명해 보았는데, 여성주의가 내게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은 모든 여성의 몸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엔 화장을 안 하고 꾸미지 않은 여자의 얼굴과 몸이 추레해 보였는데, 지금은 보통 <예쁘다>고 평가되는, 힘줘서 풀메이크업 화장을 한 여성의 얼굴이 뭔가 경극배우 처럼 느껴지고, 가련해 보인다. (물론 자기만족을 위한 화장도 있을 것이지만 화장에 대한 주제까지 넘어가면 너무 판이 커지므로 패스) 

왜냐하면 여성을 바라볼 때, "성적대상화에 따른 <여성>/성적대상화된 <여성>으로서 실패한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형태의 삶을 사는 여성 그 존재 자체로서 한 <사람>일 뿐이고 단지 성별이 여성인 것이라는 인식으로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5. 운동을 하면서 일어난 변화

 

 

나는 내 몸도 자연스러운 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인식론적 혁명이 일어나니, 더 이상 체중을 감량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다. (사족으로 아직 입술에 립글로즈를 생략하는 것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ㅜㅜ 노메이크업으로도 당당해질 수 있을 때까지 더 발전해야 한다)

누가 나를 등빨 좋다, 살집 있다고 여기든 말든, 어쩌라고?

운동을 통해 나는 점차 더 건강한 몸이 되어가고 있으니까, 난 행복한데, 내가 행복하면 됐지 뭐!

 

 

 

 

 

 

5월에 요가를 시작하면서 측정했던 인바디 결과이다.

요가 덕분에 사지의 근육 중에서 양팔의 근육은 간신히 적정 라인으로 들어왔다.

전체 수치를 깜박하고 사진을 못 찍어두었는데, 근육량보다 체지방량이 훨씬 많았다.

 

 

이 전에 처음으로 인바디를 했을 때는 더 심각했다(당시 지금보다 10kg이 덜 나가는 <날씬>한 몸이었음). 몸무게만 날씬했지 마른 비만에 가깝고 심폐 기능도 동갑내기들보다 떨어지는, 의학적으로 봤을 때 건강하지 못한 몸이었다.

 

 

 

오늘 측정한 인바디이다.

한 달 간 몸에 넘치는 활력이 좋아 미친듯이 운동을 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폭식을 하지도 않고, 군것질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살이 더 많이 찐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도

어쩐지 요즘 체중이 운동 시작 전보다 더 늘고 있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근육량이 상당히 증가한 것이다.

일명 '근육돼지'가 된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옛날 같았으면 늘어나는 체중을 보면서 나 안한다고 때려치웠을 텐데,

난 뿌듯했다. 왜냐면 내 운동의 목표는 다이어트가 아니니까.

 

심폐기능이 향상되고, 기초대사량이 증가하고, 근육량이 많아진

건강한 몸을 갖고 늙어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게 내 소원이며 목표이니까.

 

 

 

 

+

오늘도 한 시간 동안 순환 운동하고 나머지 한 시간 동안 아쉬탕가 요가 수업을 받고 집에 왔는데

온 몸의 근육들을 남김 없이 골고루 사용했다는 뿌듯한 피로감에 행복감이 들었다.

온몸에 땀으로 범벅이 된 느낌이 좋았다.

(물론 운동하는 순간에는 무슨 기합받는 거 같아서 선생님이 잠시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