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길 지나 보이는 골목으로 5분간 걸어가면 리나 비앤비가 나온다.
갔더니 남자 사장님은 어딘가 외출하셨는지 안 계시고, 여자 사장님이 계신다. 날이 습해서 빨래 맡긴 게 다 안 말라서 지하에서 건조기로 건조하셨다고 하시며 정갈하게 빨래를 개어 놓은 걸 쇼핑백에 담아 주신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짐을 챙기면서 오늘 내 일정에 대해 몇 마디 나누었다.
"하이델베르크 성은 올라가 보셨어요?"
"네, 갔는데 오늘 월요일이라 오디오가이드를 안 하더라구요. 학생감옥도 문을 닫았구요."
"아! (탄식하심) 아쉽네요. 오디오가이드 들으셨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그리고 그 발자국 아무도 모르던데요. 직원들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 거에요?"
"그게 정말 눈에 안 띄는 곳에 있어요. 오디오가이드 들으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데 정말 아쉽네요. 다음번에 와서는 꼭 오디오가이드 들어 보세요."
다음번이 있을까. 여행자들끼리의 '다음번' 기약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지만 그 순간의 진심이기 때문에 언제나 뭉클하다.
짐을 다 챙기고, 배낭을 매고 삼각대와 카메라 가방을 매고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나갈 채비를 하면서, 중앙역으로 가는 트램을 타야 하는데 20분 남은 상황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안색이 변하신다. 버스를 놓칠 수도 있다고 빨리 가야 한다고 하면서 같이 트램 정거장까지 가 주시겠다고 한다. 앞서서 빨리 걸으셨다.
그리고 트램 정거장에 도착.
여자 사장님이 말씀하신다.
"2분 후에 트램이 온다고 전광판에 떴어요. 그 트램을 타시면 5시 버스를 타실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이 짐이랑 들고 저 건너편 표 자판기 다녀오다가 트램 놓치시면 5시 버스까지 놓치실 테니, 제가 저기까지 뛰어가서 표를 끊어 올게요. 만약에 그 사이에 트램이 들어오면, 원래 그러면 안되긴 하지만, 무임으로라도 타고 그냥 중앙역으로 가세요."
그리고 건너편 트램 승차권 자판기로 뛰어가신다. 아, 있는 동안 정말 민폐만 끼치고 가는 구나. 뭉클하고 너무 감사했다.
다행히 트램이 들어오기 전까지 여자 사장님은 표를 끊어서 내가 있는 정거장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트램이 돌아왔고,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 있는 동안 정말 좋았다고, 행복했다고,
잘 계시라고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트램에 올랐다.
그리고 금세 트램이 멀어지는데, 재빨리 카메라를 꺼내들어 나에게 손을 흔드시는 여자 사장님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는데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어서 아까 ISO 400 으로 설정해 놓은 걸 깜박하고 바꾸지 않아 셔터스피드가 1/6 로 충분치 못해 이런 사진으로 남았다. 안녕, 고마웠어요, 리나 언니. 잊지 못할 거에요.
그리고 트램은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지나 중앙역으로 향한다.
만감이 교차한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물씬 떠오른다.
중앙역에 도착했더니 시외버스 출발 시간까지는 10분 정도가 남았다. 다행이다.
역 앞의 사연 많아 보이는 동상을 한장 찰칵.
그러고 나서 저녁거리로 뭔가를 사야 했다.
맥도날드였나, 버거킹이었나 기억이 안 나는데 역에 있어서
구입하려고 들어갔는데 줄이 너무 길다. 나한텐 10분이 남았는데.
그래서 그냥 물이랑 과자 하나를 구입했다.
그리고 나서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우리 버스인가?
아니었다. 이 정류소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고,
예정 시각을 15분 초과하여 뮌헨 행 고속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둑어둑 해가 졌고,
나는 일단 넷북으로 사진을 옮긴 후
1TB 외장 하드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독일의 고속 버스는 상당히 쾌적하다.
이런 저런 사진도 찍어보려 했으나 너무 어둡고 빛이 확보되지 않은데다
버스가 덜컹덜컹 흔들리니 단념하고 영화나 감상하였다.
바로 <비포 선라이즈> 복습!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3부작 영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은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비포 선라이즈>보다는
뭔가 더 현실적이었던 <비포 선셋>이었지만.
다른 두 편도 굉장히 좋아한다.
내가 꼭 가보고 싶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이제 이번 여행의 핵심인 발칸 반도로 내려가려면 거칠 수 밖에 없는 나라, 오스트리아. 여기서 어떤 도시를 볼까 많이 고민했고, 독일의 여행과 내 성향을 뒤돌아보았을 때 잘츠부르크는 내 성향과 맞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과감히 제외. 강풀의 <마녀>에 나와서 알게 된 할슈타트도 역시 내 취향이 아닐 것 같아서 제외. 역시 나는 대도시가 더 좋다. 비엔나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면 비엔나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오페라를 들으러 가나?
아니,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이 정처없이 걸어다니던 장소들을 찾아서 기념 사진을 찍을 것이다. 오페라니 박물관이니 미술관은 다니지 않을 거다. 나도 물론 미술관 관람 좋아하긴 하지만, 이 먼 나라들에 여행까지 와서 실내에 갇혀있는 건 딱 질색이다. 사람 붐비는 거리를 다니는 것이 좋지.
영화를 보면서 틈틈이 아이폰으로 네트워크 연결을 시도해 보았다. 와이파이가 잡힌다! 일단 숙소를 구해야 하는데. 난 용감무쌍하게 숙소도 정하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가고 있었던 중. 일단은 오스트리아 빈의 한인 민박 <소미네>와 <움밧 호스텔> 두 곳의 위치를 체크해 두고 둘 중 한 곳은 방이 있겠지 뭐, 하고 수첩에 찾아가는 길을 메모해 두었다. 와이파이까지 잡히다니, 독일 버스 만쉐이~!!
그리고 10시 40분에 뮌헨에 도착하였다. 예정 시간보다 20분을 넘겨서.
Meinferbus에서 내려서, 이제 11시에 출발하는 Euroline 버스를 기다리면 된다.
아, 뮌헨이다. 2005년에 배낭여행을 온 곳이다. 부다페스트 짐 보관소에다 짐을 맡기고 친구와 시내 관광 후 짐을 받아 뮌헨 행 야간 열차에 오른 후 짐을 열었더니 없어져 있던 카메라. 그와 함께 날아갔던 모든 추억들. 열차 안에서 계속 울었고,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싶은 심정으로 우울한 기분에 시달리며 도착했던 뮌헨이다. 로만틱 가도와 벨기에를 구경하겠다는 친구와 뜻이 달라 런던에서 만나자고 이곳에서 헤어지고, 나는 뮌헨 거리를 우울하게 돌아다니다가 프라하로 떠났었다. 그 뮌헨을 다시 9년만에 찾은 것이다. 중앙역을 보노라니 그때의 심경이 생각난다. 그 젊음이, 우울감마저도 그립고 뭉클하다.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 20분 밖에 안 남았지만 너무 추워서 역사로 들어갈까 해서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가
역 구내를 어슬렁 거렸지만
역 구내나 플랫폼이나 춥기는 마찬가지.
안에서 두 명의 사람과 마주쳤다.
대학생인지 20대의 외모로 갈색 머리를 포니 테일로 뒤에서 정갈하게 묶고 유니섹스 캐주얼 스타일의 파카를 입고 배낭을 맨 채 벽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 책을 읽던 한 여자 한 명이 있었고, 까만 비니를 쓰고 파카를 입은 외모가 단정치 못한 남자가 거기서 더 떨어진 곳에 역시 혼자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버스 도착 시간이 남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그냥 밖으로 나왔다.
이곳도 생각난다.
여튼 뭐 이번 여행에서 뮌헨은 경유지에 불과하니
아쉬운 마음으로 역을 조금 둘러보고
다시 터미널로 왔다.
유로라인 버스가 도착할 전광판 아래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앞에 남자 다섯명 무리는 버스를 기다리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계속 낄낄거리며
연신 담배를 피워핸다.
특히 하얀 바지를 입은 남자는
잘해봐야 16~17세 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무리의 아저씨들과 같이 함께 계속 줄담배를 피워댄다.
헐.
문화 충to the격.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대충 사진이나 찍었다.
전광판에 11번 승강장에 빈Wien 행 버스가 온다고
안내되어 있었으므로 11번 승강장 벤치 앞에 그냥 앉아 있었다.
내 옆의 벤치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짐작을 할 수 없게 생긴
50대로 보이는 노부부가 짐을 잔뜩 싣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발이랑 캐리어 인증샷도 찍어주고.
유로라인 버스가 올 예정인 23:00시 정각이 되었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뭐, 하이델베르크에서처럼 20분정도 연착하나 보지, 하고 태연히 기다린다.
그리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유로라인은 아닌 저 버스가 들어온 다음에
갑자기 툭, 시동이 꺼지더니,
11번 전광판의 "Wien 23:00"라고 씌어 있던
불까지 다 꺼진 것이다!
완전 멘붕.
경악하는데,
아까 그 남자들은 전광판 불이 꺼지자마자
모두 박수를 치며 낄낄낄 웃는다.
"브라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이가 없어서 나도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이런게 문화 차이인 건가.
옆에 있던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게 생긴 부부중 아주머니와
나만 완전 멘붕에 허겁지겁 쩔쩔매기 시작한다.
이 겨울에, 추운데 오밤중에 차가 끊기다니!
난 오스트리아로 가야 하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차가 끊겼다. 나는 뮌헨에서 빈으로 가는 유로라인 버스를 57유로나 주고 구매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밤 11시. 차가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역 한쪽의 화장실인지 매점인지 지키고 있던 터미널 관리인으로 보이는 분한테 항의를 한다. 눈이 땡그랗고 안경을 꼈으며 키가 작달막하고 짧은 머리에 종 모양의 모자를 쓴 아주머니였다. 서양인처럼 생겼으면서도 한편 터키나 아랍쪽 아니면 여튼 그런쪽 나라 사람 같기도 하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짐작도 안 가게 생긴 엄청 다혈질의 아주머니었다.
관리인은 영어를 못 하는 노인이었다. 손짓으로 하는 의미는, 전광판을 가리키며, 전광판에 없으면 그런 버스는 없다, 이미 떠난 거다, 라는 제스처로 독일어로 쏼라쏼라. 아주머니는 완전한 문장이 아닌, 단어를 끼워맞춘 짧은 영어로 서로 쏼라쏼라, 독일어와 짧은 영어로 옥신각신.
나는 내가 찍은 DSLR 카메라 LCD창을 가리키며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관리인에게 손짓발짓을 써 가며 말했다.
"이 사진을 보라. 아까까지는 이렇게 불이 켜져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 꺼졌다. 전광판에 아까까지 있었다." 하고 내 티켓을 들이밀며 표에 적힌 행선지와 시간을 가리켰다. 표에는 독일어로 써 있으니 이건 알아듣겠지.
옆에서 아주머니가 같은 편이 생겨서 더 전투적 의지를 불 붙이며 나에게 맞장구를 치며 쏼라쏼라.
관리인은 표를 보고 잠시 갸우뚱 하더니 알아보러 간다고 했다. 아까 앞에서 "Wien 23:00" 전광판이 꺼지자 "브라보!"하고 열렬한 박수 갈채를 보냈던 사내 무리 중의 한 명도 기웃기웃, 우리 쪽으로 왔다. 그러더니 그 사내와 눈이 땡그란 아주머니는 같이 역시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함께 대화를 하고, 관리인 노인과도 대화를 한다.
사실 나는 좀 불안하긴 하지만 이런 상황이 재미있기도 했다. 무료하게 관광, 산책, 이동만 이어지던 예측 가능한 여행에서 가끔 해프닝이 생기는 것이 바로 배낭 여행의 묘미이지. 이런 예기치 못한 해프닝이 발생하면 생기는 약간의 재미와 흥분을 느끼고 있었달까. 이제 무슨 일이 생길까? 하고. 나는 변태인가…. 뭐 나는 표를 구매했으니, 안 되면 내일 아침 뮌헨 터미널 창구가 오픈하면 가서 항의하면 되지. 그럼 뒷 표로 보상받고, 시간이 나면 뮌헨 시내를 산책해도 좋고.
터미널 관리인, 5인 중 한 사내, 부부 일행 중 눈이 땡그란 부인, 세 사람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하고, 대화가 끝나고 나서 아주머니가 나한테 짧은 영어로 말을 한다.
"(5명의 파이팅 넘치는 남자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사내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독일어를 약간 할 줄 안다. 그래서 저 사람(관리인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했는데 빈으로 가는 버스가 지금 프라그(프라하)에서 오고 있다고 한다. (아주머니 발음이 알아듣기 힘들어서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서 버스에 전화로 확인한 것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를 으쓱, 했고, 아주머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역시 어깨를 으쓱, 했다. 그리고 함께 한바탕 웃었다. 이제야 뭔가 안심되는 듯.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난 코리아에서 왔다."
"아, 꼬레." 반갑다는 어투다.
"그러는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난 머스코우에서 왔다."
응? 머스코우? 그게 어느 나라인지 몰라서 되물었더니, 계속 머스코우~ 머스코우~하는데 어느 나라일까 기억을 쥐어짜내다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Moscow 모스크바에서 왔구나. 러시아 사람이었구나.
"아! 러시아에에서 왔구나."
"그렇다. 우리는 (남편을 가리키며) 남편이 빈에서 convention (역시 알아듣기 힘든 발음이라 컨벤션이 맞는지 정확치는 않다)이 있어서 나와 함께 온 것이다."
조용히 앉아 있는 남편은 정말 얌전한 성격이었다. 인중에만 덥수룩한 희끗희끗한 수염이 났고, 베레모를 쓴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춥다고 부인에게 외투를 덮어 주는 등 알게 모르게 부인을 챙겨주는 성품이 가정적인 남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러시아에 꼭 가보고 싶다."
"러시아는 매우 춥다."
러시아 사람이라니! 너무 신기했다. 세 번의 유럽 여행 중에서 러시아 사람을 보기는 처음이다. 내 간접 경험의 깜냥에서 짧은 감상을 그 아주머니에게 불어넣는 일반화가 그닥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 건 맞지만, 나는 감상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흔히 묘사되는 '러시아적 기질'을 아주머니에게서 엿본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은 얼굴에 주름지고 작달막하고 통통한 아주머니이지만, 젊었을 때 이 아주머니가 얼마나 러시아적 매력을 뿜고 있엇을 지에 대해 상상했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소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여주인공 그루셴카의 외모와 성품에 대해 묘사하면서 젊음이 주는 매력을 한창 풍기는 아름다운 아가씨였으나 나이가 먹으면 그저 그런 드센 아낙네가 되어버릴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임을 묘사했었는데, 뭔가 그루셴카가 나이를 먹으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아주머니.
"아까 저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러시아인인가?"
"아니다. 저 사람들은 헝가리 인이다."
헐. 이 뮌헨의 버스 정류소에서 별의별 나라의 사람이 다 있네. 독일인 관리인, 러시아 부부, 한국인인 나, 헝가리 여행객들까지. 막연히 다 독일인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서양 사람들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중국, 한국, 일본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머니와 몇 마디를 더 나눴고, 그리고 아까 내가 앉았던 자리에 와서 앉았다.
마음이 좀 놓여서 뮌헨 정거장에서 연착된 버스를 기다리는 기념으로 셀프샷을 찍었다. ㅋㅋㅋ
너무너무 추워서 하이델베르크에서부터 입고 왔던 얇은 가을용 야상을 벗고 패딩 점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50센트인가를 주고 유료 화장실을 이용했다. 캐리어는 러시아 아주머니께 잠시 봐달라고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캐리어를 맡길 수 있냐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저기엔 뭐, 옷가지 밖에 없다. 카메라, 넷북, 외장 하드, 삼각대, 렌즈, 지갑, 현금, 카드, 여권 등의 중요한 물건들은 모두 몸에 휘감고 복대에 차고 있으니까.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와서도 시간이 더디게 갔다. 간혹 버스가 한두 대씩 왔다가 나갔고, 그 버스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덜덜덜 떨면서 계속 기약없는 버스를 기다렸다. 뮌헨에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드디어 유로라인 버스가 도착햇다!
러시아 부부, 헝가리인 일행 5명, 나 모두 일동 기립박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나서, "Wien 23:00" 전광판이 비로소 켜졌다(그 사진은 안 찍었는지 없다).
러시아 아주머니와 나는 미소를 주고 받으며 활짝 웃었다.
현재 시각 0:40. 무려 1시간 40분이나 연착한 거다!!
저렇게 뚱뚱해서 몇 시간 동안 운전을 하면 건강에 무리가 오지 않을까 싶어 걱정될 정도로 뚱뚱한 체구에 콧수염을 길렀고 버스 기사 제복에 유니폼 모자를 쓴 사내가 차에서 내려서 검표를 했고, 다른 평범한 외모의 버스 기사가 트렁크에 짐을 실어 주었다. 유럽에서 고속버스를 타면서 관찰한 바로는, 버스마다 항상 두 사람의 기사가 타서 일을 교대로 한다는 것.
버스에 써 있는 행선지를 보니 기가 막혔다. 프라하-뮌헨-빈-부다페스트를 경유하는 엄청난 장거리의 유로라인 노선이었다. 버스에 탔더니 여태까지 탔던 독일 버스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더러웠다. 승객들이 버린 콜라병이며 비닐 봉지 같은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바닥은 발로 밟으니 찐득찐득거렸다. 이런 버스를 타고 오스틀리아 빈까지 가야 한다니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있는가, 게다가 버스 좌석은 꽉 차서 모르는 사람과 함께 앉아야 했다. 지금까지는 2인석을 독차지하며 다녔는데.
뒷쪽에 좌석이 하나 있었고, 청바지에 재킷을 입은, 뭔가 90년대 패션 같은 느낌의 옷을 입은 키 크고 피부는 하얗고 머리가 덥수룩한 한 청년 옆에 앉았다. 실례한다고 말을 하고 옆에 앉았다. 나는 캐리어 말고도 짐이 많은데다 등짐에 귀중품과 카메라 장비 및 넷북 같은 것들이 있어서 옆 자리에 놓고 탔었는데 여기에서는 안고 타야 한다. (머리 위 짐칸에 놓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 그랬다가 도둑맞을까봐 난 이런 경우에는 늘 품에 안고 탔다)
옆 자리의 청년이 수줍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 나도 인사했다.
"안녕"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한국이다. 당신은?"
"루마니아."
그리고는 말이 끊겼다. 알고봤더니, 영어가 짧아 더 이상 못 하는 것이었다(나도 영어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따금 휴대폰을 꺼내어 만지작거리는데, 한국에서도 7~8년 전에 사라진 슬라이드 피쳐 폰이었다. 드디어 버스가 뮌헨 터미널을 출발하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목에 매고 있던 DSLR의 LCD창을 들여다보며 며칠 동안 찍은 사진을 감상하는데, 루마니아 청년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기도 옆에서 보고 있다. 부담스럽게 그렇게 보지 말라구요.ㅜㅜ
그러다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리더니, 과자 하나를 꺼내서 나한테 건넸다. 수줍은 듯 내밀고, 말은 없다. 고맙다고 받아서 먹었다. 참 뭔가 순박한 느낌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나는 목베개를 꺼내 목에 걸치고 무릎과 가슴에 등짐과 카메라 가방을 꼭 껴안은 채로 잠들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나 달렸을까, 버스가 멈추고 불이 켜졌다.
출발한지 1시간 후인 1시 40분 경에 버스가 멈췄고 버스 기사 두 명이 승객들을 모두 깨우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국경지대였던 것이다. 국경 검문소의 직원이 버스에 타서 모든 승객들의 여권을 수거해갔고, 버스 안은 조용해졌다. 여권을 검사하는 동안은 항상 긴장이 흐르는 침묵이 버스 안에 흐르게 되곤 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여권을 돌려 주었고, 버스가 출발했다. 드디어 이번 여행에서 첫 국가인 독일을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간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들었다.
세 시간 정도 더 달린 후였던 것 같다. 잠시 휴게소에서 멈췄다
나도 다리를 펴려고 휴게소로 나갔고, 나가는 길에 아까 그 러시아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함께 활짝 웃었다. 우리는 어젯밤의 동지이니까. ㅋㅋㅋ 그리고 매점에 가서 목이 말라 물과 과자를 하나 샀다. 루마니아 청년은 자기 동료들과 담배를 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까진 그렇게 조용하더만,역시 영어를 못해서 그런 거였어.ㅋㅋㅋ 그리고나서 내 옆 자리로 돌아왔고, 나한테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이 사람 진짜 순박하다.ㅋㅋㅋㅋㅋ 나도 방금 산 과자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여행자들끼리 길고 고단한 여행동안 공유하는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도착하겠지. 긴 여정이지만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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