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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흔적 - 잡글

[D-1]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기대하며 - 칸트 철학과 공리주의의 대격돌

몇 달 전부터 마블빠로서 #어벤져스엔드게임 을 기대하며 쓴 글인데 딱히 게재할 플랫폼을 찾지 못해 그냥 여기에 올린다. (아직 안 본 분은 없겠지만 인피니티워 및 전작들의 스포일러 많음)




곧 어벤져스 원년 멤버들의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다. 전 세계가 타노스에게 이를 갈고 있기에, 우리의 히어로들이 타노스를 어떤 전술로 어떻게 이기냐에 대한 관심과 추측이 각종 커뮤니티, 인터넷 매체와 유투브 등에서 난무하고 있지만 그건 감독들이 알아서 잘할 테니 아묻따 믿고 감상하고 싶고, 그보다는 도대체 어떤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그릴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그 이유에 대해 길게 주절거려보고자 한다.



해피엔딩보다는 잘 만든 비극 혹은 열린 결말을 좀더 좋아하는데, 특히 영화가 (물론 케바케이지만) 해피엔딩인 경우 “오, 사이다~” “개존잼!” 하고 극장을 나와서 길어야 하루 이틀 더 되새기면 끝으로 곧 잊히곤 했지만, 비극이나 열린 결말의 작품은 여운이 오래 남아 곱씹어보며 사유를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1년 내에 본 영화 중에서 『플로리다 프로젝트』, 『쓰리 빌보드』,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와 같은 작품들을 거의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경우 몇몇 장면을 떠올리면 과장이나 섣부른 판단 및 자의적인 해석 없이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그려졌던 주인공들의 비극이 생생하게 떠올라 아직도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린다. 이런 수작을 두고 관음증 변태적인 영화가 미장센 운운하며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니 아직도 화가 난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위선적인 영화이다. 내러티브적으로는 “선함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작 영화에서 긴 시간을 할애하여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소위 ‘액션’ 이라고 일컫는 폭력, 전투, 파괴, 살인 장면이고 관객은 ‘선함’ 혹은 ‘정의’를 명분으로 대리 만족하며 이를 즐기러 극장에 가는 것이니까. 물론,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 에서 소개했던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마냥, 정교한 사회와 도덕 시스템에 촘촘히 얽혀 폭력성을 맘놓고(?) 발휘하기 다소 힘든 현대인들에게 일견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 의 저작 『악마 같은 남성 Demonic males』 에서도 지적하듯이, 영장류 수컷의 폭력성은 DNA에 뿌리 깊이 새겨져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지성이라는 무기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고 잔혹하게 진화하였고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왔다. 내재된 폭력의 본성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축적되다 급물살을 타고 임계점에서 폭발하며 전세계적,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사건들이 굵직굵직한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니, 퍽이나 후진 옛날 이야기다.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등으로 유명한 세계적 석학 스티븐 핑커 가 제시하는 통계와 성찰에 의하면 통념과 달리 인간 사회는 점점 선해져 폭력과 전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소수자들이 점차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세계는 어떻게 다양성을 지니고 혐오 사회에서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느냐와 대한 화두를 놓고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씨름하고 있다. 핑커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넓게 보면 영장류 전체, 좁게 보면 호모 사피엔스에 내재된 폭력성을 발휘하려는 욕망까지 깡그리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초적 폭력성을 발산하는 방식은 시대적 흐름과 영화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타고 좀더 건전한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이드id는 전쟁과 폭력, 살인을 스크린을 통해 즐기고 있다. 초자아superego가 마음 속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하며 죄책감을 덜어주어 가볍게 즐기기 더욱 좋다. 이 명분을 부여하는 복잡한 작업을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다소 유치한 장르였던 슈퍼 히어로물을 수준 높게 만든 것이 #케빈파이기 산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큰 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는 것을 힘들어해 슈퍼히어로물을 극혐했던 나까지 팬으로 만들었으니. 최근엔 슈퍼 히어로 영화 장르의 문법만 빌려와서 더욱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스릴러물(『캡틴아메리카: 윈터솔져』), 인종문제(『블랙팬서』), 청소년 성장물(『스파이더맨: 홈커밍』), 유쾌한 가족 드라마(『앤트맨과 와스프』), 페미니즘(『캡틴마블』)까지.



『인피니티워』는 작년 2018년 한해 동안 영화 팬들에게 큰 충격과 배신감을 선사한 작품이다. 결국 악이 승리했으며 정의의 사도인 어벤져스는 명분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변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의 광팬으로 10번 정도 관람했다. 당분간은 후속작인 엔드게임 없이 이런 결말도 그냥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너무 좋아했다.


일단 액션 영화로서의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인물이 30명 가까이 나오는데 불협화음 없이 잘 어우러지고, 불필요한 대사는 단 한 줄도 없다. 정교하게 짜인 모든 대사와 상황 설정은 각 인물들의 개성, 가치관과 내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복선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부조화일듯했던 인물들의 앙상블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며 그 접점에서 고도로 계산된 유머가 빵빵 터진다. 악인의 일대기에 효과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서, 흉측한 보라색 괴물을 관객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만들었다. 콧대 높으신 각종 영화제에서 홀대 받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향후 100년 동안 손꼽힐 명작 중 하나가 되리라고 예상한다. 배드엔딩으로 유명한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국의 역습』과 『시스의 복수』 가 그러하듯이.

 



앞서 말했듯이 후속작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 동안 관객들을 몰입시키기 위해 도대체 히어로들에게 어떤 명분을 부여해줄까?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에서는 히어로들이 갈등으로 쪼개지고 서로 전술도 공유되지 않은 채 시작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처참하게 당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야기와 예고편에서 암시한 바로는 히어로들은 심기일전 중이며 남은 명분은 이제 복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복수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타노스는 이제 자신의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고 명예도 물욕도 없이 오두막에서 쉬고 있는데? 감독은 관객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초점은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일 텐데, 복수는 루소 형제가 그간 작품들에서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절대로 아니다(아이러니하게도 ‘avengers’는 복수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전작에서도 복수심에 눈이 멀었던 자들은 다 실패했었다. 예1: 타노스 손에서 인피니티 건틀릿을 빼기 전에 연인 가모라를 잃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고 희대의 트롤러가 되어버린 스타로드. 예2: 역시나 니다벨리르에서 힘들게 새로운 무기 스톰브레이커를 만들어 와 놓고도 아스가르드인들과 동생 로키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실패한 토르(감독 코멘터리에서 밝히기로도 도끼날을 타노스의 가슴에 꽂으며 타노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토르는 복수의 희열을 즐겼다고 한다). 괴로워하며 타노스는 말한다. “너, 실수한 거야. 내 머리를 노렸어야지.” 그리고 있는 힘을 그러모아 핑거 스냅, 딱! 인류의 절반이 먼지가 되며 상황 종료.

 



『인피니티워』에 이어서 『엔드게임』에서도 보여줄 핵심 키워드는 타노스와 캡틴 아메리카의 가치관 싸움이라고 예상해 본다. 타노스는 비용·편익 분석을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양적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의 21세기적 후계자이자 맬서스 인구론의 실제적 집행자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칸트의 정언 명령의 충실한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인피니티 워를 본 관객들이라면 타노스에게 이길 뻔 했던 몇 가지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어차피 절반이나 다 죽을 거 마인드 스톤의 소유자인 비전을 좀만 더 일찍 죽였다면 몰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스타로드가 이성을 잃지 않아 건틀릿을 타노스의 손에서 벗기는데 성공했다면? 스타로드가 가모라를 일찍 죽였다면 소울 스톤은 아예 찾지도 못했을 텐데. 토르가 좀더 냉정하게 타노스의 머리를 노렸더라면? 뒤의 두 가정은 히어로들의 인간적이며 불완전한 면모와 복수심의 무용함을 보여줬다면, 앞의 두 가정은 비용 편익 분석적으로 보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나 최악을 막기 위해 차선책으로 절반을 죽여도 괜찮다는 타노스의 가치관과 진배 없는 섬뜩한 가정이다.



『인피니티워』에서 두 가치관의 격돌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된 ‘기차 비상 선로에서의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무고한 1인을 고의적으로 살해하여 5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살인은 정당한가?” 세계 기아 문제 전문가인 장 지글러 는 유명한 저작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기근이 인구를 조절한다는 맬서스 이론에 대해 “자신들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자들의 전형적인 유럽적·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라며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를 의식했는지 감독들은 영리하게도 타노스를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실행하는 자로 묘사되며 스톤만 챙기면 전투를 멈추고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사라진다. 그는 ‘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랜덤으로 공평하게 절반만 죽인다’.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심지어 타노스 자신도 랜덤으로 살아남은 쪽에 속한다고.

We don't trade lives.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놓기』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가 존중되는 존재자로서 생명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캡틴은 칸트 철학의 수호자이다. 『시빌 워』에서는 소코비아 협정에 반대하며 지성적인 존재로서 자율적인 의지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칸트의 도덕 철학의 핵심 정신을 실천한 바 있다. 『인피니티워』에서도 역시 그는 비전이 자신을 죽이라고 하자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We don’t trade lives(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결과론적인 비용 편익 분석으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정의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생각이며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캡틴은 졌고, 동료들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참혹한 와칸다 전투 현장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황망한 표정으로, 처음으로 신을 찾는다. 이보다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캡틴은 자신의 정의를 고수할 수 있을까? 지난 10년 간 캡틴의 여정을 그린 6편의 영화를 지켜보면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반드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 그 신념을 멋지게 그려낼 것인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개봉을 남겨두고 가장 흥분되는 지점은 두 가지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과, 캡아는 도덕 판단을 비용 편익으로 분석하며 생명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한 방 날려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은 얼마나 멋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