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숙소를 향해 출발한다. 가는 길에는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한다.
야생동물이 모두 어우러진 곰탱이.
저녁 9시 반이 다 되어 간다.
아침 7시 반 부터 일어나, 상당히 빡센 일정을 소화해냈다.
크고 많은 요소요소가 숨어 있는 베를린의 매력을 다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한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이어서 아쉬웠지만,
모든 것을 다 보겠다는 욕심은 버리고 내가 보고 싶은 것들에만 집중하여 후회는 없다.
베를린 대성당이나 제국 국회의사당의 전망대,
박물관 섬이라든지 페로가몬 미술관이라든지
볼 거리인데 내가 못 본 것들은 아주 많이 있지만,
내가 베를린에 온 이유는 분단의 역사를 딛는 베를린의 오늘을 보고 싶었고,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주는 특유의 페이소스를 느끼고 싶었으니까.
베를린에 간다니까 엄마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아니 멋진 곳 다 놔두고 왜 하필 그런 공산국가 쪽을 가려고 그러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럽 여행을 하면서 베를린을 갔다는 친구도 그저 그랬다면서
왜 다른 아름다운 도시들을 놔 두고 하필 베를린이냐고 물었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지만.
난 역사와 현재가 동시에 살아 숨 쉬는 생동감 있는 도시가 좋다.
그래서 서울에서도 광화문과 종로, 청계천 일대를 사랑하고,
앞선 포스팅에서도 말했듯이 산토리니 같이 이쁘장하게 박제 인형처럼 보존되어 있기만 한 소도시보다 아테네가 더 좋았다.
테러의 토포그라피 박물관과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베를린 장벽과 브란덴부르크 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과 지게스조일레를 보려고 왔고,
뜻하지 않게 트라비 사파리 전시관이나 바우하우스 전시관까지 본 것은 정말 행운이다.
실망했지만 현지의 바피아노를 체험한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 도시를 일 주일이고 이 주일이고 더 깊게 느끼고
노천의 까페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도 부려 보고
티어가르텐을 산책도 해 보고 사람 구경도 해 보고 싶었는데
바쁜 일정에 그것을 못 한게 가장 아쉬웠다.
베를린에서 재미있었던 것을 하나 덧붙이자면,
이번 유럽 여행에서 내가 보았던 나라들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스페인
6개국 14개 도시 중에서 단연 거리의 스트리트 패션 센스는 가장 최고인 도시였다는 것.
베를린에는 멋쟁이들이 정말 많다.
그냥 길거리 사람들을 쳐다보고만 있어도 하앍하앍
선남선녀들이 가득하다.
서양인이어서 기럭지가 달라서 그래 보이는 건가, 싶었지만
내가 나중에 갔던 다른 도시에서도 다 간지나는 스타일로 가득차 있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민박집 부부 사장님께서도 베를린 사람들은 멋쟁이들만 모였다며 칭찬을 늘어놓으심.
숙소에 도착했다.
나는 소주를 정말 좋아하지 않지만 여행지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면 내놓으려고
참이슬 소주 4팩을 챙겨 왔는데 같이 방을 썼던
민영 씨와 동주 씨와 함께 나누고 싶어서 참이슬을 깠다.
신나하며 소맥을 맛있게 말던 민영씨.ㅋㅋ
마침 MBC 다큐멘터리 촬영팀 관계자분들도 같이 술 한잔 하자며 부르셔서
주인 남자 사장님과 PD님 세 분, 작가 언니, 우리 방 사람들 이렇게 함께 합석하여 술자리를 가졌다.
PD님 한 분이 가져온 복분자주도 올라왔다.
주로 여행 이야기나 커리 부어스트, 학센(독일식 족발) 같은 음식 먹어봤나, 뮌헨이었던가 여튼 어떤 도시의 학센이 유명한 맛집에서 먹어봤는데 굉장히 맛있더라 같은 이야기, 각자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와 방송 촬영 뒷 이야기, 내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결혼에 대한 설왕설래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한인민박집의 저녁의 담소 시간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주제도 역시 나왔지.
"오늘은 어디어디 보고 오셨어요?"
나에게도 이 질문이 돌아와서,
"저는 오늘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랑, 바우하우스 기념관, 지게스조일레,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브란덴부르크 문 보고 왔어요" 했더니 다들 식겁하신다. 아니 하루에 두 개 보는 것도 힘든데 무슨 그렇게 무식하게 많이 보고 왔느냐며.
바리톤 저음의 남자 사장님이 굵직하고 점잖은 어투로 말씀하신다.
"우리가 얘들 문화를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난 뭐 베를린 와서 이거 저거 본다고 돌아당기느니 난 차라리 그래. 여기 와서 손님들이 어디 가장 추천하시냐고 물어보면, 상수시 궁전이니 어디니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운터 덴 린덴에 있는 길거리의 카페 중에서 한 군데 들어가서 커피 한 잔만 딱 시키고 앉아서 두 시간 정도 있어 보라고 그래. 가만히 길거리 다니는 사람들이나 구경하라고. 얼마나 재미있는데. 근데 아무도 안 그래."
이 말이 나오니까 PD님 중 한 분이 말씀하시길,
"지금 촬영 중인 이 방송의 포맷이 독일의 4개 도시에서 각각 한 군데씩, 한인 민박집과 관련된 스토리를 담는 건데, 첫 번째 방송 편인 함부르크 편 민박집 주인 여사장님 남편이 독일인이에요. 근데 그 둘이 결혼한 스토리가 재미있는 게, 지금은 50대 아주머니이신데 옛날에 처녀 때 그 여사장님이 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시키고 얌전히 앉아 있는데 지금의 남편 분이 첫 눈에 반해 바로 연락처를 물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결혼했다고 하시더라고."
모두가 우와 대박, 멋지다~라고 하는데 누군가가 말씀하신다.
"XX씨(내 이름)도 어디 카페 같은 데 가서 앉아 있어 봐요. 혹시 알아? 누가 대쉬할지."
"아유~ 누가 저한테 대쉬해요~ 말도 안 돼~"
"아니 뭐 미인이구만. 딱 들어오는데 미인이 들어오네 하고 처음부터 생각했었는걸."
"아하하;; 아니 전 이제 결혼할 사람이에요. 식장도 다 잡아 놓았다구요."
(제 입으로 제가 미인이니 어쩌니 하는 칭찬을 들었다는 걸 블로그에 쓰는 것도 웃기지만 이 블로그는 광고나 허세를 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소중했던 기억과 사진 자료들을 잊지 않고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고 싶어서 운영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블로그이니 보다가 짜증나도 참아주세요.ㅜㅜㅋㅋㅋㅋ)
요즘 사진에 히피같이 초췌한 몰골로 찍힌 것 + 베를린 아가씨들이 매우 스타일리쉬한 것에 대해 주눅이 든 것 때문에 외모 자신감이 극도로 하강되어 있었는데 그저 감사할 따름 ㅜㅜ
"아니 근데 결혼할 남자친구 놔 두고 여기 혼자 여행온 거에요? 보내줘요?"
"일단 직장인이라서 여기 한 달이나 올 수도 없구요, 제가 이제 의전원 합격하고 의사될 때까지 여행갈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며 선배들도 지금 다녀오라고 추천하셨어요. 결혼하면 여행할 수도 없구요. 그리고 저를 다 이해해 주는 사람이에요. 내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인 것도 다 알구요."
자연스레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흘러갔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이 주제엔 특히 비혼이며 예쁘장하고 나이대보다 훨씬 동안인 작가 언니가 특히 열심히 의견을 내 놓았다. 왜 결혼을 하려고 하느냐, 결혼을 하면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는 것 아니겠냐는 그런 이야기들.
"글쎄요. 결혼한다고 뭐 나라는 존재가 다 없어질까요?"
"아니 생각해 봐요. 예를 들면 XX씨(나)는 혼자서 장기 배낭 여행을 세 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고 그러면서 결혼하면 그럴 수 있어요? 시어머니가 저 한 달간 배낭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하면 이해해 줄까요?"
맞는 말이긴 하다. 결혼을 하면 점점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검열을 해야 하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애라도 낳으면 누구의 엄마인 나만 남게 되겠지. 그게 너무너무 싫어서 결혼을 미뤄 왔던 거고. 그러나 모든 것은 얻으면 잃는 것도 있고, 잃으면서 자연스레 얻는 것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결혼에 대한 마음이 슬슬 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알아? 나중에 50대에 늦게라도 또 장기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을 지도.
여튼 앞의 여행에 대한 화제로 다시 돌아가면, 나도 여기 민박집 남자 사장님 말씀에 동의한다. 반드시 박물관이나 미술관, 무슨 궁전 따위를 보는 관광이 여행의 다는 아니라고. 별 것 못 봤어도 현지인들의 삶을 관찰하거나 어울리면 더 좋고, 도시의 정취를 느끼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음, 나도 빡세게 돌아다니긴 했지만 베를린을 첫 여행으로 택한 이유들, 꼭 가보고 싶었던 곳들 이외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포함한 장벽과 전승기념탑(지게스조일레), 브란덴부르크 문과 전쟁의 상흔을 보고 싶어서 왔고 그래서 베를린 대성당엔 가지 않았지만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에는 갔다.
베를린에는 분단의 상흔을 보고 싶었고, 라이프치히는 바흐의 무덤을 찾기 위해, 하이델베르크에는 25년 전에 부모님과 찍은 사진을 다시 같은 장소에서 재현하기 위해 여행지로 정했다. 드레스덴은 그냥 남들의 막연한 추천으로 끼워넣은 거고(역시 이런 여행지는 나중에 다 후회하게 되더라.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도 그렇고 후회했다).
라이프치히에 바흐 무덤을 찾기 위해 간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라이프치히에서 들으려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mp3로 담아 왔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성악 전공 교수 경력이 있는 남자 사장님이 특히 재미있게 들으셨다. 이 아가씨 참 재미있는 아가씨네~ 하시면서.
한편 미술학도인 동주 씨는 내가 바우하우스 기념관을 다녀왔다고 하니 역시나 관심을 보였다. 나는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특히 문외한인 나도 너무너무 좋았는데 전공자이시니까 정말 좋아하실 거에요! 라며 강추했고 동주 씨도 꼭 가봐야겠다고 말하였다.
PD님과 작가 언니.
새벽 세 시가 되었다. 드레스덴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려면 아침 6시에는 일어나야 되는데 여행자들끼리의 순간의 교감이 너무 소중해서 차마 끊지를 못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다 자리에서 늦게 일어나 버렸다. 기분 좋게 취했던 밤이었다.
참, 이날 어쩌다 보니 내 다음 행선지 중에서 하이델베르크도 있다고, 거기서는 25년 전 부모님과 여동생과 가족여행 당시 찍었던 사진을 들고 가서 그 현장을 찾아 똑같이 사진을 찍을 계획이 있다고 말했더니 작가 언니가 솔깃, 하시더니 방송팀의 여정에도 하이델베르크가 있다며 이 스토리로 방송에 출연해 보는 건 어떻겠냐며 나를 엄청 열심히 설득하셨다. 나는 TV 출연이 내키지도 않고, 라이프치히에도 들러야 해서 일정이 맞지 않는다며 거듭 사양했다. 그러나 작가 언니의 설득도 집요했다. 하이델베르크 민박집인 리나 B&B의 주인 부부도 촬영하려고 가는데 거기로 와서 방송에 잠깐만 출연해 달라고. 그러면서 내 일정까지 계산해서 짜 주셨다. ㅋㅋㅋㅋ 부모님도 분명 매우 기뻐하실 거라고. 정말 좋은 스토리이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지 않겠느냐며 작가 언니가 열심히 나를 설득했고, 나도 작가 언니의 열성에 이기지 못해 결국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1월 19일에 하이델베르크에서 꼭 만나자고 약속! 약속!을 거듭한 작가 언니는 현지 코디네이터와 리나 B&B 주인 부부의 전화번호와 연락처를 나에게 쥐어주었다.
이상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세 시간 자고 내일은 드레스덴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와야 한다.
헐 방송 출연이라니.
살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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