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행 오스트리아 항공에 몸을 싣는다. 한국어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중국어와 독일어만 들릴 뿐이다. (당연히, 둘 다 알아들 을 수 없는 언어임) 하긴. 한국인이 북경 발 비엔나 행 비행기를 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서울에서 유럽의 다른 주요 대도시로 취항하는 항공편도 많은데 굳이 북경까지 가서 비엔나로 갈 일은 없겠지. 나처럼 이상하게 꼬인 루트로 여행하는 사람이나 타지.
비엔나 행 오스트리아 항공 OS064편은 보잉 747 기종이었다. 승무원 유니폼과 로고, 상징물들은 붉은 색. 빨간 유니폼은 외려 아시아권의 승무원 유니폼보다 다소 촌스러워 보였다. 서구권은 승무원을 한국이나 아시아에서처럼 선망받는 참한 여성 직업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하던데, 연관이 있는 걸까. 모르겠다.
비행기에 타서 승무원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니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밝은 곳에서 어두운 기내로 들어오며 DSLR의 설정값을 바꾸는 걸 깜박하여 유령사진이 되어버림. 아직 멀었어.ㅠㅠ
(여행 말미 쯤에 나는 LCD창을 보지도 않고 셔터스피드와 조리개값, ISO, 화이트 발란스까지 빛에 따라 빨리빨리 능수능란하게 조정할 수 있는 스킬을 획득하게 되었지만, 이때는 한없이 부족할 때였다.ㅠ)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어릴 때, 비행기 처음 타보는 사람 등은 창가 자리를 선호하지만 비행 경험이 많아질수록 비좁은 이코노미석에서는 복도쪽 좌석이 더 편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복도쪽에 앉게 된다. 그러나 나는 왜 아직도 창가에 앉고 나서 몇 시간 뒤에 다리 저리다며 후회하는 것일까.ㅠ.ㅠ
내 옆의 복도쪽 좌석에 앉았던 소녀는 11시간 동안의 비행 내내 새침하고 도도했다. 키가 170에 8등신은 되어 보이고, 나이는 열 예닐곱 쯤 되어 보이는 오스트리아 긴 생머리 블론드 소녀였다. 가족들과 함께 베이징 여행을 다녀 온 듯 보였는데 일행으로부터 좌석이 혼자 떨어진 듯. 그리고 많은 멋쟁이 코카시안 여성들이 비행기에 올랐다. 모두가 예뻤고 한국 여성들보다 롱부츠와 겨울 패션이 훨씬 잘 어울리고 멋졋다.
신기한 게, 옛날에 20대 초반에 유럽 여행을 가서 코카시안 여성들을 보았을 때 별로 부럽다고 생각지도 않았고 딱히 그들의 외모가 우월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확실히 주눅 들고 있었다. 코카시안들은 비율이 좋고 다 예쁘다. 굉장히 부러웠다. 원래 쟤네들이 우리보다 더 예쁜 게 아니라 쟤네들 기준의 미적 기준이 내게 학습된 결과로 그들이 더 예뻐 보이는 시선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부럽고 열등감이 드는 것이었다. 지난 10년 간 내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서구인 중심의 미적 기준이 더 강화되어 학습된 것일까.
기억은 사진으로 재구성된다. 사진은 반드시 내가 보았던 것들을 대표적으로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행을 다녀온 지 5-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당시 상황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는 베이징 국제공항을 비행기 창밖으로 쳐다보며 사진을 찍으며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내 기분은 어땠었더라? 정작 11시간 내내 시선의 90% 이상을 두었던 기내 사진은 별로 없다. 묵었던 숙소나 매일 타던 교통수단 내부보다 잠시 지나친 관광지 사진이 훨씬 많은 게 여행이다. 그리고 기억은 사진으로 재구성된다. 그걸 조금이라도 저항해 보려고 「길 위에서의 사진」을 많이 찍어보려고 노력했던 여행이었으나, 턱없이 부족하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질주할 때 찍은 사진. 이런 겹겹이 날개 모양은 아마도 양력을 극대화시키는 구조겠지? 신기하다, 라고 생각하며 사진을 찍었으나 실제로 눈으로 본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을 포착하지 못해 아쉬웠다.
베이징도 언젠가 와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며 창 밖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 생각을 했던 건지 확실하지는 않다.
어느덧 비행기는 이륙하여 베이징 상공으로 떠오른다. 이제부터 11시간 동안 고생할 기장과 부기장을 생각하니 뭔가 숙연해졌다. 파이팅,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음.
어느새 베이징은 멀어지고 중국 대륙의 장대한 산맥이 비행기 아래로 펼쳐진다. 한국의 산과는 다르면서도 장엄한 동양화 같은 풍경이 멋지다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창 밖만 내려다 보았다.
이륙한 지 30분 쯤 지났을까. 안전벨트 지시등이 꺼지고 승무원들이 다과를 나눠주기 시작한다. 맥주에 토마토주스에 물까지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았다. 나중에 비엔나 여행에서도 실컷 마셨던 Ottakringer 맥주. 맛있었다.
그리고 매번 촌스럽게 잊지 않고 찍었던 기내식 사진. 오스트리아 항공 기내식도 꽤 괜찮았다. 다진 감자와 닭고기와 구운 야채를 곁들인 요리였다.
기내식을 다 먹고 나서 나는 베를린 간다고 또 허세를 부리기 시작.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를 넷북으로 감상하였다. 자막 번역이 시원찮았고 영화도 난해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 옆자리 오스트리아 소녀는 좌석 앞의 터치스크린으로 1997년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감상하였다. 디카프리오의 리즈 시절, 참 어여쁘기도 하여라. 흘깃흘깃 훔쳐 보았다. 내가 중학교 때 개봉했던 영화였는데, 내 옆에 이 여자애는 그 때 태어나기나 했었을까? 후훗.
결국 영화는 다 보지 못했다. 넷북 배터리가 간당간당해서 1시간 정도 보고 껐다. 30시간 넘게 잠을 자지 않은 상태로 비행하는데, 이상하게도 막 졸립지는 않아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래도 이번 여행엔 만반의 준비를 해와서 기내용 수면양말, 목베개를 유용하게 사용. 오래는 아니고 3시간 정도 잤던 것 같다. 자고 일어나서 빼꼼이 창문을 여니, 창문에 성에가 얼어 있다. 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빛이 비추면 방해될까봐 창문을 빼꼼이 살짝만 열고 사진을 찍었다.
구름 아래에 나와 다른 가치관과 생활 양식을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기분이 묘하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광경에서 나는 바람같이 스치다 가버리고 말 뿐인 존재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헛헛하다.
내 앞의 사람이 터치스크린으로 뭔가 게임을 하고 있다. 나도 숨은 그림 찾기, 수학 방정식 풀기 등의 게임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내 옆의 소녀도 잠에서 깨어 내가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걸 보고 자기도 하기 시작한다. 소녀는 거의 찾지는 못하고 화면만 눌러대다 그냥 포기. 나는 게임을 클리어했다. 후후후.
영화도 종류별로 다양하게 제공된다. 난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을 준다. 실망스럽게도 샌드위치 하나가 다이다.
오스트리아 항공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이다. 장거리 비행을 몇 번 해 보았는데, 대개는 기내식이 2회 제공된다. 장거리에서 정식 기내식을 한 번만 주고 한 번은 샌드위치로 때우는 곳은 처음 보았다.
그래도 샌드위치는 따끈따끈하고 맛있었다.
친절했던 오스트리아 항공 승무원.
우크라이나 근방 상공이었던 것 같다. 밭 모양으로 눈이 쌓여 있어 신기해서 찍었으나 아득히 먼 저 아래까지 선명하게 초점이 잡히지는 않더라. 수십 번 시도했으나 안 되어 포기.
드디어 11시간 가량의 비행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접어든다. 동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지구 자전에 의한 8시간 가량의 이득을 본 것이다. 한국시간으로는 밤이겠지만 아직도 낮이다.
이제 비엔나 도착이다. 베를린까지 한 번의 비행을 더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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