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의 이륙을 기다릴 때마다 항상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8년 전, 성인이 되어 떠난 첫 해외여행에서 비행기를 탔을 때, 함께 했던 친구와 함께 재잘대며 바라보던 창문 밖 활주로의 전경. 첫 여행의 설렘, 기대감, 흥분, 젊은 날의 열정이 뒤섞여서 두근거리던 기분, 그리고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르곤 한다.
“내가 친한 오빠가 했던 이야기인데,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바퀴를 떼는 순간은 첫키스를 하는 순간의 느낌과 비슷하대.”
지금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 돌이켜보면 참 오글거리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첫 여행의 흥분과 설렘, 짜릿한 기분을 적확하게 표현한 말이라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물론 그 이후에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매번 비행기를 탈 때마다 지금 이 순간 활주로에서 바퀴가 들리는 기분이 그때만큼 짜릿할까, 생각하며 이륙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양 옆의 회사원들은 늘 있는 오전 8시의 지하철을 통한 출근이나 비행기 출근이나 별 다를 게 없다는 표정으로 잠을 청하고 있고, 나는 옛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멍하니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기내에서 엄마랑 남자친구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전화를 하고, 아빠와 동생에게는 문자를 남겼다. 이윽고 비행기가 활주로에 자리를 잡자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바퀴가 들리고 순식간에 공항과 활주로의 정비차와 관제탑과 사람들이 점점 작아진다. 첫 키스의 기분 따위보다는 베르누이 법칙을 적용해서 비행기를 설계한 사람은 참 천재야, 물리학의 신비란, 이런 생각이 차라리 현실감이 있더라. 여튼 온갖 잡 생각을 하는 도중에 인천 상공을 날아 비행기는 하늘로 솟아오른다.
북경과 서울은 짧은 거리이지만 기내식이 제공된다. 촌스럽게 카메라를 꺼내어 기내식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그것도 작은 디카나 폰카도 아니고 대포만한 탐론 28-75mm 렌즈를 물린 DSLR을 꺼내들어 말이다. 오른쪽에 앉은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재빨리 기내식을 먹고 뭔가 프리젠테이션 서류를 집어들어 열심히 읽고, 왼쪽의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또다른 정장 차림의 남자는 아예 기내식을 먹지도 않고 잠을 자고 있다.
아시아나 항공의 기내식.
오픈한 모습.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라고 하기엔 너무나 깨끗하게 다 비웠다. ㅋㅋ 맥주까지 다 비웠음.
내 왼편의 남자는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 끝내 잠에서 깨지 않았고, 그 사이 스튜어디스가 이런 쪽지를 붙여 놓았다. 이것이 고객감동 서비스인가 보다. 하하.
한 시간 남짓의 비행이 끝나자 북경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온다. 나는 보안 검색대를 빨리 통과하기 위해 짐을 overhead compartment에 올려놓지 않고 모두 무릎에 지고 비행을 마쳤다. 착륙하고 나서 모두가 짐을 내리는 동안, 앞줄인 덕분에 나는 비즈니스석 승객들 다음으로 재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떨리고 두렵고 걱정되었다. 이런 성격의 내가 덜커덕 6일 전에 항공권을 질러서 여행을 무작정 왔다는 게 참 믿기지가 않는다. 비엔나 행 비행기를 제 시간 내에 잘 타야 할 텐데. 북경 공항 보안 검색대가 까다롭다고 했었는데, 잘 되어야 할 텐데.
북경 공항은 역시 한국 여행객이 많은지 곳곳의 표지판에 한국어 표기가 잘 되어 있었다. 무리 없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였다. 참, 겨울 여행은 껴입은 옷이 많아 보안 검색대 통과하는 일이 참 귀찮다. 겨울에 여행을 온 것이 처음이라 인천 공항에서는 버벅댔었는데, 워낙에 비행기를 많이 갈아타는 일정이다 보니 나중에 귀국할 때 쯤에는 외투를 벗고 소지품에서 넷북을 꺼내고 벨트를 풀고 하는 일들을 기계적으로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인천의 아시아나항공 리셉션 직원의 걱정은 기우였고, 금방 게이트를 통과해서 1시간 반 가량 시간이 남게 되었다. 나는 천천히 게이트 E27로 향하면서 북경 공항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인천 공항이 세계에서 제일 큰 공항이라고 들었었는데 여기가 더 규모가 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단 건물 구조는 웅장했으나 상업 시설과 면세점은 인천 공항이 훨씬 나았던 것 같다.
이때는 시그마 10-20으로 넓게 담았다. 광각렌즈를 효과적으로 잘 쓰는 법은 생각보다 어렵다. 화면의 왜곡도 심하게 일어나고.
오후 12시 20분, 한국 시각 13시 20분에 북경을 출발해 비엔나로 가는 OS064 편 대기 게이트이다. 공항의 시계들을 보고 아, 시차가 한 시간 났었지, 하고 시계침을 돌릴까 하다가 베를린에 최종적으로 도착하면 돌리자, 하고 걍 놔둠.
의자에 짐들을 늘어놓고 발을 뻗고 사진 한 장 찰칵. 한국인들이 다 사라지고 중국인들과 오스트리아 인들 일부가 나와 같은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얼굴 사진도 한 장 찰칵. 초췌하기 짝이 없다.
예전에 남유럽 여행시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릴 뻔한 악몽을 겪은 이후로 내 짐이 잘 부쳐졌는지 걱정이 되어 일일이 확인한다. 중국인 스튜어디스에게 내 보딩 패스를 보여주면서 아시아나 항공에서 오스트리아 항공 비행기로 짐이 잘 부쳐졌는지 확인을 부탁했고, 단아하고 이쁘지만 무표정했던 그녀는 성의 있게 대처하여 수하물이 잘 부쳐졌음을 말해주었다.
이후로는 안심하고 시간이 남아돌아 이곳저곳 사진을 찍어댐. 실력도 부족하고 새 장비들이라 손에 익지 않았지만.
먼 동아시아까지 배낭 여행을 온 오스트리아 청년이 잠을 청하고 있다. 어디를 여행하고 환승을 기다리는 중일까.
나의 보딩 패스.
뭔가 길게 느껴지던 두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다시 비행기를 탈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베이징 국제공항을 뒤로 하고 비엔나까지 11시간의 장거리 비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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